[공통시대] 평론 글 : 김종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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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뜻은 ‘Common Era’(CE)에서 찾아야 해요. ‘주님의 해에’라고 풀이 되는 ‘Anno Domini’(AD)의 중립적 표현이죠. 특정 종교에서만 사용되는 숭배의 뉘앙스를 배제하는 거예요. 그의 작품이 무언가 종교적인, 그러니까 숭배의 어떤 상황을 연출한 것은 아닐 거예요.

바닥에 설치한 오브제들이 제기(祭器), 촛대, 향로, 찻상과 같은 것들이어서 어떤 죽음이나 제의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상상할 뿐이죠.

벽화 이미지는 여성의 생식기관이에요. 바닥과 벽에 검은색으로 크게 그렸고요. 벽에 그린 것의 자궁에는 다이아몬드 같은 수정체가 있고, 자궁관술에서는 작고 둥근 소포들이 물방울처럼 쏟아져 내려요. 질 안쪽에는 푸른색 덩이 하나가 있고요.

그 기관의 뒤에서 새파랗게 생긴 길쭉한 아메바 형상의 무엇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며 위협하고 있어요. 벽과 창문에는 그것보다 작은, 검고 푸른 타원형의 괴생물체들이 이빨로 물어뜯기라도 할 듯 돌아다니고 말예요. 흡사, 삶(푸른)과 죽음(검은)의 난투장 같아요.

그 중 어떤 것들은 탯줄에 감긴 듯하고, 탯줄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삶이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을 삶이 먹어 치우는 것처럼.

이 상황을 미루어 짐작건대 작가는 생사의 문제를 다른 게 아닐까 싶어요. 달리 생각해 보면 자궁은 생명을 잉태하는 성스러운 ‘방’(房/宮)이죠. ‘방’(자궁)의 죽음은 더 이상 생명이 깃들이 않는 것을 의미해요. 마치 작품이 그려진 이 ‘방’(전시공간)처럼 말예요.

바닥에 그린 기관의 자궁에는 붉은 판이 하나 있어요. 그 판에서 실핏줄 같은 두 개의 붉은 선이 천장으로 이어지죠. 얇고 둥글어요. 몇 가닥을 이어 붙여서 천장에 닿도록 했고요. 그뿐이 아녜요. 제기에서 이어지고 자궁관술에서도 이어져요.

찻상에서, 바닥에서 솟구치듯 십 수개의 핏줄이 이어졌죠. 벽화가 평면에 그린 위장술이라면 붉은 선들은 그 위장술의 ‘환영’(幻影)을 실제화 한 장치가 아닐까 해요. 두 개의 제기와 두 개의 촛대는 파래요. 죽음을 위무하는 것들이 생을 위무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죠.

‘공통 시대’는 그것이 설치된 방의 주인을 숭배하거나, 혹은 거기 살았던 사람들을 위한 제의(祭儀)는 아닐 거예요. 사람을 품고 삶이 지속되었던 한 방에 대한 오마주일 거예요. 그 방은 삶이 잉태되는 공간이었고 그 삶의 지나간 시간들이 쌓여서 세월이 되는 공간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이 멈추지 않았을까요? 삶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멈춘 방에는 주인 없는 어두운 그림자만 가득했을 거예요. 그는 그 삶의 거리를 측정할 수 없었죠. 도저히 잡히지 않는 삶의 거리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그 방의 ‘(황홀한) 눈부심’을 보았을 거예요. 그 눈부심의 실체가 이 벽화일 테고요.

김종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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